우리 모두 혹은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겁함, 철없음에 대하여

연을 쫓는 아이10점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이미선 옮김/열림원

청년이라 불릴 수 있는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때, 그래도 아직은 성숙보다는 성장이 어울린다는 것에 안심을 느낀다. ‘연을 쫓는 아이’를 읽을 때 아직은 ‘바바’나 ‘알리’가 아닌 ‘아미르’일 수 있는 내가 다행이라 생각한다.

몇 일 전, 아끼는 후배와 서로 책을 선물하였다. 나는 문피아의 캔커피 김지훈 작가의 SF소설 ‘더미’를 선물하였고, 후배는 ‘연을 쫓는 아이’를 선물해주었다.  ‘더미’도 훌륭한 책이었지만 ‘연을 쫓는 아이’에 받은 감동에 비하면 조금은 부끄러워질수 밖에 없었다. 캔커피님의 광팬이어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연을 쫓는 아이’는 그만큼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아들 ‘아미르’는 자신의 비겁함과 비굴함을 잘 안다. 그리고 아버지 ‘바바’를 답답해 하면서도 동경하고 존경한다. ‘아미르’는 자신이 모르는 ‘바바’가 짊어져야 할 ‘하산’의 원죄에 더한 죄를 더할 때, 자신의 비겁함과 비굴함에 크게 실망하고 이를 평생 안고 살아간다. 후에 이 원죄를 알 때, 따라갈 수 없을 것 같던 ‘바바’를 좀 더 알게되고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을 방법을 찾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한 어린이가 어른으로서 성장으로 잘 나타나는데, 만약 이 길이 쉽다고 결론지었다면, ‘연을 쫓는 아이’는 세상에 큰 주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이 어렵고 해결될 것 같으면서도 계속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에 이 책에 푹 빠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시원스럽게 끝내지 않는다. 그 길의 끝이 보이지 않음에도 ‘아미르’는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 끝의 희망적인 단서를 마지막에 매우 아름답게 표현함으로 이 책은 끝난다.

문피아의 어디선가 읽은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어른은 결과를 받아들이고 어린이는 이를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무리하다가는 서서 갈 것을 무릎으로 기게 되고 배로 밀며 가게 된다는데, ‘아미르’의 상황이 딱 그렇다. 자의든 타의든 사랑하는 ‘하산’과의 문제를 회피하다가 결과적으로는 충격적인 배신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아들은 아버지가 되어가고 싶어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아들은 자신에 실망하며 아버지를 동경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인 아들에게 엄격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되고 그의 아픔을 알 때, 비로서 아버지가 되는 것 같다. 이러한 성장 과정을 매우 아름 답게 쓴 이 소설에 큰 찬사를 보내고 싶다. 위대한 웅변가들 처럼 심금을 울리는 말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그 찬사를 기가 막히게 표현할 텐데. 국어 공부 좀 해야겠다.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장

피크 Peak6점
이기호.해이수.김설아 외 지음/현대문학

이 소설에 이기호님의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장’이 실렸다고 합니다.
온실안의 나른함 속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떠한 행동을 할까? 할일이 그다지 없는 20대의 어느 순간에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흔할 것이다. 목적지향적이고 대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상황이 어려워도. 30대 이후는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는 20대의 시간 중에서 앞서 말한 안드로메다로 가는 순간을 많이 만나온 것 같다. 그러한 순간순간 장르문학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런데 가벼운 느낌으로 보는 소설들이 결코 가볍지가 못했다. 가벼운 것들은 감탄을 이끌어 내지 못했고. 정말 재미있는 걸작들은 나를 음습함으로 끌고 들어갔다.

공자님이 一日三省 하라 하였는데, 기분전환을 하고자 놀고 있는데 일일삼성하는 것은 너무도 우울하다. 그러한 중에 내 마음을 환기 시켜준 작품이 하나 있으니, 이는 이기호님의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이다. 둥둥 떠다니다 멈추어버린 정말 멍한 상태에서 나 또한 하루를 말려버릴 사건들을 여러번 겪었는데. 이 때의 일을 일기로 남겼다면, 이 소설과 무척 흡사하였을 것이다.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은 무엇때문에 “씩씩” 거렸는지 자문하였는데, 내가 이를 일기로 썼다면 소설과 마찬가지로 정답을 빼고 자문하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빼앗아 본 것 처럼, 남이 볼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해야 할 텐데, 일상의 사소한 스트레스에 치여 일탈의 공상에 빠지고 이를 실천하려는 것을 직접 말한다는 것은 창파한 일이다. 주인공의 공상은 결국 팬티인지 알 수 없는 반바지에서 윤리적으로 끝난 것이다. ㅋㅋㅋ

어제 짜증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늦은 시각 옷을 챙겨입고 나가려했다. 오늘의 짜증나는 일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를 기대하면서 후배녀석이 “지금 나갈려고요”라고 한 마디 했는데 소설에 나오는 형의 한마디 “정신차려라”와 똑같은 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옷을 다 챙겨입고 방에 가서 그냥 잤는데 또 한소리 들었다. “나갈 것 처럼 옷을 입더니 그 차림으로 자게요?” 음.. 일탈의 공상을 꿈군 나에게. 판타지를 기대한 나에게 이를 이해하고 표출시키려한 노력을 시도조차 못하게 하더니, 결국 주인공의 형 “미친 새끼”와 똑같은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날 저녁 나는 왜 나갈려고 했난 자문하면서 잠이 들었다. 공부란 그리고 일이란 당연히 해야할 것이기에 접어두었고, 나에게 일어나기 힘든 해피한 일들을 정답으로 생각하면서 잠이 들었다. 내게는 밖으로의 발걸음과 마주치는 시선과 목적을 두고 배회하는 몇마디의 대화가 윤리적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러한 윤리를 깨려고 노력하겠지?ㅋㅋ